어느새, 2024년 끝자락이다. 곧 해가 바뀔 1월이 열릴 것이다. 이맘때면 몰아치는 찬바람을 밀치듯 곳곳에서 치르는 행사들이 있다. 삶이 버거운 이웃들에게 따뜻한 눈길들이 모이는 일이다. 혹자는 꼭 연말연시에만 치르는 행사여서 아쉽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언론이나 방송은 연말을 정돈하는 의미로 불우이웃돕기를 중심으로 다룬다. 사실 연말이어서도 그러하지만 실제 가장 어려운 시기인 점도 배제할 수 없다. 여러 행사 중 자주 선보이는 행사 하나가 점점 더 얼음장이 되어가는 산동네를 달구는 연탄배달 봉사다. 사실 그 행사 말고도 따뜻한 눈길들은 어렵고 힘든 삶을 향해 멈춤 없이 다가가고 있다. 겨울 말고도 계절에 상관없이 온정을 베풀고 있다는 말이다. 시각장애를 가진 내가 그 눈길들을 체험하고 있다. 그래서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오늘도 현관 앞에 김장김치 한 통이 놓여 있다. 해마다 봉사단체들이 주민센터에 모여서 직접 담근 김치이다. 이곳에 이사 온 지 수년째인데 한해도 거르지 않고 있다. 평범한 김치 한 통이 아니다.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겨울바람이 뜨거워지는 김치 한 통이다. 깊은 밤 빗장뼈를 훑는 냉기를 데우는 김치 한 통이다. 언 마음이 따뜻해지는 김치 한 통이다. 지속적인 경제발전 속에서도 언제나 삶이 버거운 사람들은 존재한다. 비단 물질의 빈곤뿐만이 아니다. 이웃의 눈길이 끊긴 채 마음의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이웃을 호명해야 한다. 그 누구든 언제나 몸과 마음이 혼자가 아니어야 한다. 눈길과 눈길이 마주해야 한다.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한다.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우리는 외로운 상황을 너무 흔히 겪고 있다. 우리는 철저히 사람이 그리운 존재이다. 뜻하지 않게 고독에 놓인 사람들에게 내민 손길이 얼마나 따듯한 일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핵가족을 넘어 각자도생인 세상 속으로 흩어진 우리의 길을 환하게 펼쳐야 한다. 지금 나와 마주한 소중한 얼굴과 함께 그 환한 길을 손 잡고 걸어야 한다.
눈길
부르기만 하면
목소리 쪽으로 고개가 돌아간다
보이지 않는 내 눈을 잊은 것이 아니다
언제나 의식보다 빨리
돌아가는 얼굴, 열리는 눈동자
보여 주는 것이다
마주친 눈길과 눈길이
한순간 한길이 되듯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찰나
반짝 켜지는 얼큰한 이웃
뜨거운 밥 한 끼 나눌 수 있을 때
따뜻한 우리가 되는 것이다
가끔은, 아무도 호명하지 않는
기진한 사막 한복판
도무지 끝을 모를 캄캄한 길
순간 꺼져가는 어깨를 감싸오듯
이름을 부르는
빛나는 별들을 한차례 바라보고 있을 때
눈꺼풀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
속속들이 젖는 눈길 속에서
새로운 길이 펼쳐지는 건
걸어온 걸음마다 고인 그리움만큼
환해지는 눈동자의 오래된 습성이다
-손병걸 시, '눈길' 전문-
이러저러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는 말을 듣곤 한다. 그때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다름이 아닌 내 경험 때문이다. 어찌어찌 두 눈을 잃고 내 삶이 지하방으로 옮겨진 때였다. 전기료도 가스료도 제때 못 냈다. 여름은 그럭저럭 버텼다. 그러나 겨울은 상상을 초월했다. 동사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봄을 맞이했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 사람은 밀린 내 요금들을 처리해 주었다. 나는 그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내가 알아낸 정보는 이름을 알리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다방면으로 긴 시간 물색을 해도 찾을 수 없었다. 딱한 내 사정이 누군가를 통해 전해졌는지 머리맡 창문으로 들여다보았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간혹, 뉴스에서 나와 비슷한 체험담을 들려 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생각은 더 큰 생각으로 확장하며 나도 어딘가에 사랑을 전하려 노력한다. 좋은 일은 빠른 속도로 전파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사랑을 받아 보면 그 기쁨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된다. 연말연시에 눈길을 맞추는 일이 많아지면 좋겠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 겨울이 따뜻했으면 좋겠다. 아무도 눈길을 던지지 않는 곳이 단 한 곳도 없었으면 좋겠다. 이 겨울에 가슴 아픈 뉴스를 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훈훈한 2024년 끝자락에서 새로운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