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가로수 한 그루가 죽었다. 죽는 데
꼬박 삼년이나 걸렸다. 삼년 전 봄에
집 앞 소방도로를 넓힐 때 포클레인으로 마구 찍어 옮겨심을 때
밑둥치 두 뼘가량 뼈가 드러나는 손상을 입었다. 테를 두른 듯이 한 바퀴 껍질이 벗겨져 버린 것,
나무는 한 발짝 너머 사막으로 갔다.
이 나무가 당연히 당년에 죽을 줄 알았다. 그러나
삼년째, 또 싹이 텄다. 이런, 싹 트자마자 약식절차라도 밟았는지 서둘러 열매부터 맺었다. 멀쩡한 이웃 나무들보다 먼저
가지가 안 보일 정도로 바글바글 여물었다. 오히려 끔찍하다, 끔찍하다 싶더니 이윽고
곤한, 작은 이파리들 다 말라붙어버렸다. 나는
나무의 죽음을 보면서 차라리 안도하였으나,
마른 가지 위 이 오종종 가련한 것들
그만, 놓아라! 놓아라! 놓아라! 소리 지를 수 없다. 꿈에도 들어본 적 없는 비명,
나는 은행나무의 말을 한마디도 모른다.
-문인수 시인의 시 '책임을 다하다' 전문
이 시는 문인수 시인의 시집 《배꼽》에 실려있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모두들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깨닫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가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면 그제서야 삶의 소중함을 느끼고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밑둥치에 상처를 입은 은행나무도 죽음을 앞두고 더 서둘러 싹을 틔우고 끔찍할 정도로 바글바글 열매를 맺는다. 바라보는 화자는 그 모습이 애처로워 "그만,놓아라! 놓아라! 놓아라!" 소리치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다. 나무의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그 마음은 헤아릴 수 있어서다.
자연은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훼손한 인간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작가 맥스 어만(Max Ehrmann)은 수많은 별과 나무처럼 우리도 거대한 우주의 구성원이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런저런 한계에도 세상에 태어났으면 책임을 다하여 살아야 한다.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