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기 한 판
그 친구가 떠난 뒤 심리적 혼돈을 겪고 있을 때였다. '인천항'처럼 단골이었던 '고기 한판'에 자주 들렀다. '인천항'은 소방도로 중간쯤이었고 '고기 한 판'은 큰 길이 맞닿은 끝 지점에 있었다. 큰 도로가 있었던 탓일까? 비교적 가까이 은행들도 있었고 병원들도 있었고 큰 호텔들도 있었고 버스 정류장도 있었고 그 덕분에 지나는 사람들도 많았고 가게도 '인천항'보다 조금 넓은 이유였을까? '고기 한판'에는 늘, 손님이 많았다. 테이블이 한 열 개 남짓이었고 횟집 겸 숯불갈비 집이기도 했다. 부부는 열심히 일했다. 그 소방도로 양쪽에 도열한 가게 중에서 단연, 매출이 선두였다. 나날이 번성했다. 내가 가면, 무엇 하나라도 더 주려고 신경을 써 주었다. 가끔, '인천항' 그 동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시간이 약이라던가? 확실히 '고기 한 판' 그 형과 '인천항' 동생 이야기를 나누며 위로가 되었다. 나도 차츰차츰 생활이 안정을 찾았다. 다시 글쓰기도 그렇고 강연도 활발해졌다. 그런데 그 형에게 큰일이 터졌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 터지고 말았다.
2014년 4월 16일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사고로 죽었단다. 아르바이트하러 갔던 아들이 죽었단다.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임금이 높다고 자랑하며 집을 나섰던 아들이 죽었단다. 진도 앞바다에서 가라앉은 배 속에서 죽었단다. 며칠 동안 가라앉은 배에 대한 뉴스를 볼 때도 전혀 몰랐다. 형의 아들이 거기 타고 있었다는 것을 상상도 못 했다.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 애는 고등학생도 아니었다. 배와는 전혀 다른 전공이었다. 아르바이트는 자기 집 가게 일 돕기도 바쁜 스무 살짜리 아이였다. 그런데 왜 그 배를 탔을까? 나중에 알았다. 이종사촌이 승무원이었단다. 사촌 형 소개로 두어 달째 아르바이트하고 있었단다. 그 이유를 알아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들은 죽었고 아르바이트를 위해 배를 탄 4명의 사망자 명단에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그날 이후, '고기 한 판'도 '인천항'처럼 가게 문이 굳게 닫혔다. 수족관도 말라비틀어진 채 '인천항' 수족관을 닮아갔다.
내가 단골로 다니던 두 횟집이 문을 닫았다. 아니, 졸지에 우리 동네 횟집이 다 닫혀버렸다. 그랬다. 두 가게 앞에 있던 수족관은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잃은 채 다시는 공기 방울을 뿜지 못했다. '고기 한 판'은 동네 사람들이 장례식도 못 간 '인천항'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굳게 닫힌 가게 문에 포스트잇 한 장이 붙었다.
"무사히 돌아오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포스트잇 한 장의 포스트잇이 두 장이 되고 서너 장이 되더니 점점 포스트잇이 늘어났다. 끝내, 포스트잇이 가게 정면 가득 붙었을 때쯤이었다. 인천 가천대길병원 장례식장에 빈소가 차려졌다. 바닷속에서 14일 만에 아들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이종사촌 형도 함께 아르바이트한 친구도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4월 16일 이후, 나는 세월호 관련 연대 활동 중이었다. 집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작가회의 회원으로 4월 29일도 아침부터 안산에 있었고 이웃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제야 나는 형의 아들에 대한 내막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이가 시신이 되어 돌아온 그다음 날, 4월 30일 늦은 저녁 나는 이웃과 빈소를 찾았다. 아무 말도 못 했다. 슬픔이 어디까지 더 슬퍼질 수 있을까? 오늘이 바로, 아들 생일이라며 울먹이는 형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내 뒤로도 조문은 길게 이어졌다. 함께 간 동네 이웃과 조용히 소주 한 병을 빠르게 비웠다. 그 어떤 장례식장에서도 느끼지 못한 무거운 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다. 나와 동네 이웃은 조용히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잠시 뒤, 동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불 꺼진 '고기 한판' 간판 아래를 지나갈 때였다. 가게 문과 통유리창에 종전과 다른 내용의 포스트잇이 빈틈없이 붙어 있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슬픔에 동참하겠습니다… 부디, 힘내시길 바랍니다… 친구야! 보고 싶다… 부디 좋은 곳에서 행복해라… 고인의 영면을 기도하겠습니다… 너무 원통하고 분합니다… 진상을 끝까지 규명해야 합니다… 함께 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일일이 그 내용을 다 옮길 수 없는 포스트잇들이 저녁 바람에 너풀거리고 있었다. 긴 밤들이 지나고 아침이 다시 열리기를 반복하는 동안 형에게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뉴스에서 인터뷰 기사로 자주 만났다. 인천시에서 장례비를 제공했고 청해진 해운은 아르바이트는 직접 고용이 아니라서 보험 대상이 아니었다. 일반피해자 가족협의회는 학생피해자 가족협의회와 함께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부분적으로 의견이 나누어질 때도 있었다. 형은 그때마다 학생피해자 가족과 같은 진상규명 목소리를 높였다. 응원하고 싶었다.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조용히 지속해서 연대하는 길을 택했다. 곳곳에서 단원고 학생들의 영혼을 달래는 행사에 참석했다. 1주기부터 5주기에 이르도록 빠지지 않았다. 그때마다 형 아들도 함께 추모했다. 사고 당일부터 국민이 아파하며 추모한 열기는 너무도 당연한 추모들이었다. 그러나 어디서 출발한 거짓말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말들이 돌았다. 아니, 인간 같지 않은 말들이 돌았다.
"보상금이 얼마다."
"놀러 가다가 죽었다."
"교통사고일 뿐이다."
"애들 죽음을 팔아먹는다."
그야말로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될 막말을 SNS에 퍼 날랐다. 그런 자들을 향해 욕하는 정도로는 화가 풀리지 않았다. 하물며 내가 이런 마음인데 형은 어떨까? 학생들을 보낸 부모님들은 어떨까? 이 악몽 같은 시간이 어서 지나고 형이 동네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다시는 동네로 돌아오지 않았다. 매스컴에서도 만날 수 없었다.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않은 사람 같았다. 마치, '인천항' 그 동생처럼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손병걸 시인은 2005년 부산일보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푸른 신호등』,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통증을 켜다』,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가 있고 산문-『열 개의 눈동자를 가진 어둠의 감시자』, 『내 커피의 농도는 30도』가 있다. 수상은 『-구상솟대문학상』,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인국무총리상』, 『민들레문학상』, 『중봉조헌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