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창희 소장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봄이 성큼 오는가 싶더니 눈비가 다녀갔습니다. 기온도 들쭉날쭉하고요. 대한민국이 당면한 일들만큼이나 하 수상한 날들입니다. 심신이 불안정합니다. 그럼에도 큰 호흡으로 잘 견디고 있습니다.
늘 바쁘시죠? 시간 내어주어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인터뷰에 응할 만한 사람인지 인터뷰 내용이 유익할는지 그게 걱정입니다. 지면을 할애해 주셔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활발한 연구활동에 대한 질문에 앞서 요즘 읽는 책 중에서 권하고 싶은 책 한 권 추천해 주십시오.
최근 몇 년째 '장애예술과 장애미학'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는데요. 많은 분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책이 있습니다. '가와우치 아리오'의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입니다. 시각장애인인 '시라토리 겐지'와 그의 친구들이 함께 미술관을 가며 예술작품을 감상한 경험을 글로 옮긴 책입니다. 그 친구들 중 하나가 저자 '가와우치 아리오'입니다.
'장애예술과 장애미학' 연구와 걸맞은 책 같습니다. 내용이 궁금한데요. 좀 더 들어볼까요?
'가와우치 아리오'가 처음 시라토리 겐지와 미술관에 함께 간 경험으로 시작합니다. 시라토리 겐지는 그의 친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럼, 무엇이 보이는지 가르쳐 주세요.” 그런데 함께 간 친구들이 예술 관련 전공을 했거나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왕좌왕 작품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작품을 본 친구들의 이야기는 제각각 다르고 또 신기합니다. 나는 이 책에서 새로운 발견을 했습니다. 시라토리 겐지로 하여금 그의 친구들은 작품들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보는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미적 경험’의 순간입니다. 이 책은 전체가 예술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예술을 ‘하는’ 주체적 ‘감상자’로서 예술을 유희하는 방법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많은 분이 이 책을 읽고 자기만의 방법으로 예술을 경험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가와우치 아리오 지음 / 다다서재 / 22,000원
신체적 다름이나, 다른 감각들이 교차하면서 새로운 예술세계가 열리는 것 같습니다.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이 책을 만난 계기는 지난해 학생들과 수업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방문하면서입니다. 시라토리 겐지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되어서 함께 보러 갔었거든요. 그 수업은 건국대학교 교양수업인 <치유를 위한 현대미술>이었어요. 학생들과 한 학기 동안 치유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면서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정상성과 비정상성, 건강과 질병 등의 문제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목표였어요. 그런 맥락에서 종강 때 예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을 경험하는 계기를 만들고 살아가면서 주체적 삶으로서 예술적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내 마음도 전했습니다.
건국대 출강 때였군요. 현재 서울대에도 출강 중이죠?
건국대에서는 교양과목과 전공과목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전공수업으로 예술대생들에게
<현대철학의 이해> 수업도 하고 있습니다. 예술대생들에게 필요한 현대철학을 도구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1차원적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학생들이 예술이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도록 설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에서 최근 더욱 주목하고 있는 감성에 관련된 학문으로서 '현대미학'을 강의하고 있고요. 가볍게 언급한 ‘미적 경험’과 예술에 대한 이해를 한 학기 내내 다룹니다. 서울대에서는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생 들에게 예술정책에 대하여 세미나를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강의 중심으로 진행되었다면 이번 학기부터는 보다 세미나 기능을 강화하려고 하고 있고요. 그래서 무엇보다 학생들이 우리나라 예술 및 문화 정책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소장을 맡고 있는 '감성정책연구소'라는 이름이 강의 커리큘럼과 맥이 닿은 이름 같습니다.
연구소의 전체 이름은 “문화예술 공동체를 위한 감성정책연구소”인데요. 2011년도에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인 ‘예술경영지원센터’를 그만두면서 만들었어요. 목표는 예술을 통해 함께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부연하면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미학, 즉 감성학(미학)은 정치라고 설명하는데요. 시간과 공간의 감각적인 세계에 대한 것을 다루는 것이 감성학(미학)이기 때문에 이는 정치적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저도 예술을 통해서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드는 것을 꿈꾸면서 예술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연구하고 실천하는 터전으로 삼고 있습니다.
▲ 최창희 소장
일익 번창하심을 기원하며 불쑥 질문드립니다. 혹시, '미학'을 어린 시절부터 꿈꾸었나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화가가 꿈이었어요. 시인, 과학자도 꿈이었어요. 돌이켜보니 다 비슷한 꿈 같습니다. 놀랍게도 어린 나이에도 예술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전달하겠다는 꿈을 키웠어요. 그 꿈이 변화하고 발전하게 된 여러 계기가 있습니다. 첫 계기가 세종대 회화과를 다닐 때였습니다. 그림을 그리며 보다 실천적인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었고요. 그때 우연인지 필연인지 동아리를 통해 학생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아리 이름이 ‘저항과 연대를 위한 학우 공동체’였습니다. 꽤 열심히 했습니다. 동아리의 대표도 하고 총학생회장 출마도 했습니다. 빈민, 노동자들과 연대하며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 꿈이었어요. 자연스럽게 철학, 사회학 등에 대해 스터디를 많이 했습니다.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공부에 대한 욕구가 계속 커졌지요. 그 욕구 때문에 대학원 진학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날 꿈들도 그렇고 대학 시절 언행들이 내 안에 늘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이 지금의 실천적 미학연구자와 맞닿아 보입니다.
대학원 진학 준비 중이었습니다. 내 생애 첫 직업인 큐레이터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영은미술관'이라는 곳인데 개관 이전부터 일하게 되었습니다. 개관 당시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으로 미술계에서 상당히 주목받은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첫 직장으로 큐레이터가 되었으니 행운아였던 셈입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개관전 다음의 전시를 제가 기획하였는데요. 그 전시가 삼육재활학교 학생들과 예술가들이 워크숍의 과정으로 만든 전시 <만남과 표현>이었습니다. 최근 4~5년 사이 제가 집중 연구하고 있는 분야가 장애예술과 장애미학인데, 제 첫 기획전시가 장애예술 관련한 것이라는 점에서 저 스스로도 놀라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다소 옆으로 빠졌네요. 하여튼, 전시를 기획하다 보니 예술에 대해서 보다 깊게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그땐 지금처럼 연구하는 것이 직업이 될 줄 몰랐습니다.
석사학위 논문에 '백남준'을 다룬 것 같은데요. 근래 플랫폼들과 연결할 지점이 있을까요?
석사학위 논문은 「동영상 구성에 있어서 인터액티비티와 하이퍼텍스트의 문제: 백남준의 'Good Mornig.or.ell'을 중심으로」인데요. 당시 미디어아트가 유행했습니다. 천지가 개벽하던 밀레니엄 시기이기도 했고요. <매트릭스> 같은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고 미디어가 급속도로 발전하던 시기였습니다. 백남준은 우리나라 예술가이기도 하지만 세계적인 예술가입니다. 그는 텔레비전과 같은 방송 미디어가 일방향적 송출을 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자석으로 TV 주사선을 변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비디오아트의 아버지라 불리고요. 그는 대중매체를 잘 활용하면 전 세계 사람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며 즐겁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Good Mornig.or.ell'과 같은 위성아트까지 선보인 마치, 과학자 같은 예술가입니다. 미디어를 통해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 소통을 꿈꾸었던 사람으로서 대안적 미디어를 꿈꾸고 미디어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한 예술가입니다. 근래 플랫폼들이 제공하는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하되 비판적 태도를 가진다면 백남준이 꿈꾼 ‘글로벌 그루브’가 전 세계의 즐거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백남준
내친김에 박사학위 논문 「랑시에르 사유에서 예술과 노동의 문제 : 『철학자와 그의 빈자들』을 중심으로」도 소개 부탁합니다.
석사 때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예술을 연구한 이유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다 같이 행복하게 잘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박사논문과 지금까지 이어져 온 연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활동인 노동은 주체적인 것임에도 수단이고 도구적 활동으로 이해되는 것 같아요. 앞서 간단히 언급한 랑시에르는 예술은 예외적 활동인지 노동은 수동적인 것인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랑시에르는 삶이 되는 예술, 예술이 되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는데요. 예술과 노동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주체적 활동으로서 예술과 노동을 이해해 볼 수가 있고요. 그렇다면 노동 역시 예술적 활동처럼 전환이 가능하고, 예술도 특별하고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주체적 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지요. 핵심은 예술과 노동을 구분하고 위계를 짓는 거예요. 그러한 구분과 위계에 대한 주체적인 판단은 예술과 노동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 질서 모두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삶을 예술로, 예술을 삶으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그러한 경험적 주체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미적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술을 통해서 사람들이 세상을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함께 어울려 행복하게 살기를 참으로 바랍니다.
'예술'과 '미학'에 대한 이야기가 대단히 재밌습니다. 그러나 어렵네요. 조금 쉽게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미학은 감성에 관련된 학문입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다양한 감각을 통해 세계를 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감각은 세계를 이해하는 관문입니다. 그러한 감각을 새롭게 이해하고, 나아가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예술이고요. 저는 예술이 예술작품에만 속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계를 새롭게 보고, 경험하는 그 시간과 장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쉬어가는 의미로 '예술경영지원센터' 시절 에피소드 하나 들려주시죠.
제가 지금까지 예술행정이나 예술정책 분야로 활동하고 연구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예술경영지원센터의 근무경력 때문인 것 같아요. 문체부 산하기관인데, 이때도 공교롭게 설립 때부터 근무했습니다. 그래서 업무 등을 새롭게 만들어야 했지요. 2006년이었는데 우리나라 문화정책과 행정 등이 자리잡기 시작할 무렵이기도 합니다. 문화와 예술 지원정책의 체계가 만들어지고 규모도 확장되던 시기고요. 지원은 있지만 체계적 운영과 관리가 부족했던 시절이라 평가 시스템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광주비엔날레와 같은 대규모의 정부 지원사업에 대한 평가체계를 만들고 평가 업무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평가체계가 도입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제대로 잘 수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다시 환류되어서 현장이 개선되고 정책으로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전문가 평가위원들과 최대한 정확하고 올바르게 평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오늘의 '나'에 이르는 동안 자랑할 만한 업적 하나 들려주십시오.
업적이라고 말씀하시니 무엇부터 말씀드릴까 고민되네요. 지금까지 매년 발표되고 있는 미술시장 실태조사를 제가 설계했는데요. 2008년도는 한국 미술시장이 크게 확장되던 때였어요. 정부에서는 미술시장의 규모와 그 유통 과정 등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지요. 지원정책을 마련하고 문제점을 개선하는 것에 무엇보다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으니까요. 그런데 당시 미술시장 관계자들은 미술시장 조사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지금 시장조사를 하면 그나마 확장되는 시장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 엄청나게 반대했습니다. 저는 오히려 시장조사의 필요성이나 당위성이 문제이지 조사가 미술시장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하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걱정은 조사를 위해 갤러리 등의 현장의 협조가 필요한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그분들을 설득해야 했습니다. 한편 미술시장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조사표와 조사방법을 만드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여튼 조사방법과 조사전략 모두 성공적이었고요. 여전히 제가 설계한 조사 시스템으로 미술시장 조사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의미가 크네요. 최근에도 <자연의 영토: 함께-세계 만들기에 대한 예술적 물음> 예술감독을 맡은 적이 있죠?
지난해 국립생태원의 생태과학자 그리고 예술가, 인문학자와 함께 '우리가 사는 지구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함께 세계 만들기'에 대한 생각을 모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과 비인간 생명체들이 함께 살 방법을 과학과 예술의 방법으로 질문을 던지며 미래를 모색하는 전시를 만든 겁니다. 국립생태원에서 전시했는데, 전시의 형식이지만, 전체 과정은 ‘함께 세계 만들기’에 대한 실천적 방식을 모색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좋았는지 과학자분들도 그렇고 관람객분들도 그렇고 올해는 하지 않느냐고 많이 물어봅니다. 그래서 후속 작업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 <자연의 영토: 함께-세계 만들기에 대한 예술적 물음> 포스터
인터뷰 내내 느낍니다. 적극적인 습관이 몸에 밴 것 같습니다. 2025년도 여전히 많은 계획이 있겠죠?
사실, 2025년을 맞이하며 예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일보다 내 자신을 위해 시간을 더 많이 쓰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그래서 2020년에 계약하고 아직 출간하지 못한 ‘예술과 노동’에 관한 책을 꼭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또한 '한국연구재단'의 기금을 받은 ‘장애미학’ 관련 연구도 발표해서 연구자로서 제 자신을 잘 일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계획이 성공하시길 기대하며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과 독자들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항상 다 함께 행복하고 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대단히 혼란스럽지만, 그러한 날이 곧 오리라 기대합니다. 더불어, 복잡한 미학과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잘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뵐 때까지 모쪼록 평안을 기원합니다.
'감성정책연구소' 소장 최창희 철학박사는 세종대 회화학과를 졸업한 뒤 홍익대 대학원 예술학과를 졸업했고 미학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문화도시오산의 센터장, 문화도시군포 사무국장을 역임한 뒤 현재 부산광역시립미술관 소장품수집위원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