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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산문’ [연재]에어 포켓 1회
  • 손병걸 시인
  • 등록 2024-11-24 00:00:13
  • 수정 2024-11-24 03: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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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 년은 365번의 해가 뜬다. 달력의 숫자만큼 어김없이 뜬다. 때로는 뽀얀 분칠을 하듯 구름 너머로 수줍게 뜬다. 그러다가도 몽땅 익혀버리겠다는 듯 짱짱한 허공에 벌겋게 뜬다. 어느 날은 너무 빨리 뜨고 어느 날은 늦게 뜬다. 눈을 뜨고 있어도 뜬다. 눈을 감고 있어도 뜬다. 지구는 돈다. 하루가 열리고 닫히고 다시 열린다. 무한히 거듭한다. 그 어떤 하루가 누군들 고귀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 하루가 달력에서 지워진 사람이 있다. 1년이 364일인 사람이 있다. 분명히 있으나 하루가 없는 사람이 있다. 그날이 어디로 떠난 것이 아니다. 스스로 버린 것도 아니다. 있어서 확실히 있어서 오히려 없다. 눈앞에서 하루를 잃어버린 것이다. 빼앗긴 것이다. 그 사람 달력에 없는 하루가 내 일 년을 통째로 흔든다. 잃어버린 하루가 나를 자꾸만 돌아보게 만든다. 빼앗긴 하루가 미안하게 만든다. 슬프게 만든다. 아프게 만든다. 

 

아침부터 나는 여의도 63빌딩을 향했다. 한 달 전에 확정된 강연 때문이었다. 인천에서 출발할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제주를 향하던 배 한 척이 사고가 났다고…,

-오늘 새벽 인천 연안부두를 출발했다고…,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기울고 있다고…, 


짧은 뉴스 속보 뒤에 라디오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왔고 승용차는 목동을 지나 국회의사당을 지나 방송국들을 지나 유람선이 물살을 가르고 있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63빌딩에 도착했고 아나운서는 이렇게 말했다. 


-제주도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들이 타고 있었고…, 

-탑승객 300여 명 모두 무사히 구조했다고…, 


나는 그제야 안도했고 나는 즐겁게 강연했고 나는 두 시간을 넘겼고 나는 맛있는 점심을 먹었고 볕 좋은 오후가 되었고 일정은 다시 이어졌고 나는 모든 행사를 다 치렀고 나는 주최 측과 헤어졌고 나는 인천으로 출발했고 나는 다시 라디오를 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아침 뉴스는 그랬다. 어이없는 뉴스였다. 잘못된 뉴스였다. 틀린 뉴스였다. 무책임한 뉴스였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범죄였다. 뉴스는 다 오보였다. 뉴스는 뉴스끼리 충돌했다. 널을 뛰고 있었다. 언론은 허둥지둥 좌초되고 있었다. 해경은 구조 중이라고 했다. 해군, 공군이 출동했다고 했다. 항공모함도 대기 중이라고 했다. 아침 뉴스와 다른 내용이었다. 뉴스는 자기가 한 말을 자기가 뭉개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뉴스를 계속 들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끼니를 이을 수 없었다. 수십 대의 헬기가 떴고 수백 발의 조명탄이 터졌고 UDT 요원이 투입되었고 민간잠수사도 해병들도 구조 중이라고 했다.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한다고 했다. 그때까지 나는 그 바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들은 뉴스를 믿을 뿐이었다. 그래서 더 슬펐고 아팠고 답답했고 무기력했고 간절히 기도했고 무엇보다 그게 전부이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기다림이 분노로 바뀐 건 다음 날 아침부터였다. 그날 아침, 내가 생전 처음 듣고 알게 된 단어가 있다. 한동안 매스컴을 뒤덮은 단어였다. 바로, '에어 포켓' 이 단어가 얼마나 아픈 단어인지 얼마나 숨통을 조여올 단어인지 나는 몰랐다. 살면서 굳이 알 필요가 없었다. 지극히 몰라도 되었을 그 단어가 끝내 목을 죄는 트라우마의 키워드가 되었다. 샤워기 밑에서 물줄기를 맞을 수 없었다. 숨이 막혀 오는 공포가 생겼다. 수시로 눈물을 흘렸다.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여러 현장에 연대했다. 특별법 촉진 문화제 공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그냥, 시간이 많이 흘렀다.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더디게 아주 더디게 희망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시간만 흘렀다. 여전히 진상 규명은 진행형이다. 그러나 내 트라우마는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물줄기 아래에서도 괜찮을 만큼 사그라들었다. 울지 않을 만큼 사그라들었다. 비눗방울처럼 허공에 스미듯 사그라들었다. 그런데 오늘 만났다. 나의 영원한 알파, 그 사람의 364일짜리 달력을 만났다. 지워져서 더욱 선명한 그 날을 다시 만났다.



-다음주 일요일애 최종회가 게재됩니다. 

덧붙이는 글

손병걸 시인은 2005년 부산일보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푸른 신호등』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통증을 켜다』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가 있고 산문 『열 개의 눈동자를 가진 어둠의 감시자』, 『내 커피의 농도는 30도가 있다. 『-구상솟대문학상』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인국무총리상』 『민들레문학상』 『중봉조헌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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