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목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의 얼굴을 알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사실 나에게만 있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다. 어느 사람이나 가진 사소한 능력이다. 분명히 형체를 파악할 수 있는 청각적 감각처럼 볼 수 있는 감각은 시각뿐만이 아니다. 맞잡은 손에서 그 사람의 형체를 알 수 있다. 그 감각이 바로, 촉각이다. 음식을 먹다가 문득, 그리운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 감각이 미각이다. 그 어디든 나를 데리고 갈 수 있는 감각이 코끝을 찌르는 후각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사람이 쓰는 언어에서 그 사람의 성향을 눈치챌 수 있는 특수한 감각도 있다. 사람의 몸에는 그만큼 많은 감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감각을 오감으로 규정할 수 없다. 사람은 비단, 몸에 감각만으로 살지 않는다. 많은 사물의 감각과 더불어 산다. 각기 다른 공간마다 독특하게 전해오는 기운으로도 우리는 감정을 나눈다. 허공처럼 보이지 않아도 형체는 존재하고 우리는 그 형체를 인식한다.
시력이 남아 있지 않은 내가 다양한 감각으로 만난 사람들이 꿈속에 종종 나타난다. 선명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시각장애인들은 자주 체험을 했을 것이다. 중도 시각장애인들은 시각을 뺀 나머지 감각이 발달하게 된다. 특히, 청각과 촉각이 매우 발달하게 된다. 서른 초반에 실명한 나의 강력한 체험이다. 처음 만난 사람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악수를 할 때가 있다. 짧은 순간이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마음의 온도를 알 수 있다. 나와 잘 어울리는지 아니면, 나와 안 어울리는지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외모는 물론, 한발 더 나아가서 나이도 알 수 있다. 악수 뒤 나를 향해 짓는 그 표정도 알 수 있다. 성향과 형체의 총체인 목소리와 같이 손은 그 사람의 현재이자 역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만만한 이 말들이 오류일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그러나 감각의 오류는 시각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잠깐, 감각의 오류를 비관으로 규정할 필요도 없고 나는 비관하지 않는다. 때로는 즐거운 오류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 문학의 창작자로서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펴게 한다. 내게는 머나먼 이야기이지만, 위대한 예술을 낳기도 한다. 그 하나의 예가 있다.
어느 날, 피카소의 친구가 말했다. 너는 왜 동그란 컵을 타원형으로 그리느냐? 친구의 말은 옳았다. 피카소가 눈으로 보았을 때 컵은 분명히 동그란 모양이었다. 그런데 자기가 그린 그림은 그 모양과 다른 컵이었다. 피카소는 그날부터 고민에 빠졌다. 얼마간의 고민을 마친 피카소는 결국, 원근법을 버렸다고 한다. 소실점을 버렸다고 한다. 그림은 당연히 괴이한 그림이 되었다. 보이는 그대로 옮긴 그림이 그림으로 보이지 않았다. 숱한 논란을 낳은 피카소의 그림들은 당시 외면당했다. 그러나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뒤 찬사가 쏟아졌다. 물론, 지금도 호불호가 갈리는 것이 사실이다. 피카소의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다양한 것이다. 굳이, 그림에 평가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양한 의견들을 주목하고 싶다. 서로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저마다 인식할 수 있는 감각의 작동 방식이 다르다. 그야말로 다양한 감각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즘에서 완강한 농담 한마디를 던지고 싶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말은 낡은 말이다. 감각에 대한 결정적인 편견이다. 꼭 두 눈으로 보아야 믿을 수 있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소리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 속 풍경이다. 시각은 영상미디어 발달 속도만큼 이미 강력한 권력이 되었다. 현란한 화면 속에 다양한 감각을 가둬 버린다. 화면은 순식간에 바뀐다. 다른 감각이 열릴 틈을 주지 않는다. 타자를 염려할 짧은 여유를 주지 않는다.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혼자이게 만든다. 이웃의 고통과 동참할 수 없게 만든다. 풍부한 감정을 고립시킨다. 빠르게 소멸시킨다.
시각패권주의 속에서 소멸하는 감각들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 이것이 내가 펼쳐갈 문학의 화두이다. 중도 실명 이후 자연스럽게 반시각패권주의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글을 쓰는가? 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글을 쓰기 위해 점자를 익혔다. 그러나 중도 실명이어서 매우 힘들었다. 속도가 좀처럼 붙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이 정도 대답쯤에서 사람들은 내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 글쓰기 장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 장비가 무엇인가요? 바야흐로 과학 발달에 따른 특수 장비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 질문이다. 그러나 일반 컴퓨터를 쓴다. 다만, 화면에 나타난 활자를 읽어주는 화면낭독프로그램이 있다. 독서도 텍스트 파일로 읽는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읽고 싶은 책이 생길 때 타자 도움을 받는다. 화면낭독프로그램도 절반은 장애이다. 그림은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괜찮다. 나는 귓가에 들리는 환한 풍경을 믿는다. 손가락 끝에 박힌 눈을 믿는다. 오감 이외에도 무수히 존재하는 감각을 믿는다. 내가 아직 느끼지 못한 드넓은 그 세계를 믿는다. 편견이 사라진 감각 공동체가 우리가 만들어야 할 아름다운 미래라고 믿는다.
-다음주에 새로운 산문 '검은 모니터의 그림'이 이어집니다.